49장은 이스라엘이 그 열두 아들에게 축복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떤 기준으로 축복이 이루어지는가를 28절이 보여줍니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을 받았습니다(49:28). 자기 받을 복은 자기 자신이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그릇에 채워 주십니다. 뒤바뀐 운명 오늘은 장남 르우벤과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을 함께 비교해 보겠습니다. 왜 이 두 사람을 함께 살피는가 하면 르우벤은 장남이었으나 그 장자의 탁월한 복을 잃었던 반면 요셉은 11번째 아들이지만 장자의 복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장남 르우벤과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은 뒤바뀌었습니다. 역대기 기자의 해석을 보십시오. 대상 5:1-2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장남 르우벤 야곱이 장자 르우벤에게 한 예언적 축복을 봅시다. 49:3,4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그는 장자요, 따라서 야곱의 능력과 같고 기력이 시작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 자녀 중 장자로 태어난 것은 탁월한 복이라는 인식입니다. 그런데 르우벤은 장자로서의 탁월한 복을 잃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 야곱의 예언적 축복입니다. 이것은 그에게서 장자로서의 복을 뺏았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결국 르우벤은 장자로 태어나기는 하였으나 장자의 복을 받지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49: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죄가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이것은 35장에 나옵니다. 35: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르우벤의 욕정은 아버지의 여자와 동침을 하는 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인간의 정욕이 얼마나 심각한 죄를 저지를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의 음란한 죄악은 심각합니다. 소돔성의 죄악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또 38장의 유다의 정욕에 따른 죄악도 보았습니다. 여기서 또 르우벤의 정욕이 이렇게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버지의 여인과 동침할 수 있습니까? 자기 형제들의 어머니인데. 그러나 르우벤을 통해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더러운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요셉과 대조되는 부분입니다. 그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 자기 여주인의 유혹을 이겼습니다. 목숨을 걸었고 그를 통해 고난을 당하지만 그는 자신의 순결함을 지켰습니다. 르우벤은 손대지 않아야 할 것을 욕정으로 인하여 손을 대고 맙니다. 르우벤의 그 죄악은 오래 전의 일이지만 그것이 그의 미래를 망가뜨렸습니다. 그의 후손에게까지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죄를 남겨 두고 오래가다 보면 나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반드시 찾아내십니다. 아버지 야곱이 그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르우벤은 그 죄를 해결하고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죽기 전에 그것에 대하여 분명한 심판을 선언한 것입니다. 르우벤의 이 죄는 아버지에 대한 죄입니다. 아버지, 어른에 대한 죄는 늘 우리에게서 복을 빼앗아 가 버립니다. 어른 존중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입니다. 성경은 영적 지도자에 대한 존중도 매우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르우벤은 그 장자로서 누릴 탁월한 복을 그의 도덕적 불순함 때문에 잃었습니다. 장남은 두 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신 21:17). 르우벤의 그 권리는 빼앗깁니다. 아무리 큰 특권을 가지고 있더라고 죄악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탐욕은 나의 모든 것을 잃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장자의 복을 받은 요셉 요셉은 최고의 복을 받은 모델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두 몫의 복, 즉 장자의 복을 받습니다. 48:5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요셉의 두 아들이 야곱의 아들로 편입, 입양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이름 속에 들어갑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더 봅시다. 48:22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이 세겜 땅은 단순한 땅이 아닙니다. 전의 번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형제들보다 배나 복을 받습니다. 그것은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두 지파를 이루는 것으로 성취됩니다. 요셉은 이렇게 12지파 중 두 지파의 몫을 차지합니다. 아울러 49:22-26절을 보십시오. 그가 받는 복은 힘 있고 풍성합니다. 무성한 가지입니다. 힘이 있는 자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복이 임합니다. 요셉이 이렇게 복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몫을 했기 때문입니다. 장자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장자처럼 살았습니다. 그는 매우 관대했습니다. 서두에서 분량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요셉이 분량이 큽니다. 용량이 매우 커서 무엇이든지 담는 것입니다. 그는 우선 자기를 괴롭히고 억울하게 고난의 길을 걷게 만든 10명의 형님들을 모두 자기의 관대함에 담아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는 총리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그가 노예로 살면서도 감옥에서 억울하게 종살이 하면서도 그는 이미 용서한 것입니다. 마음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관대함입니까? 엄청난 그릇입니다. 분량이 큽니다. 또 다른 관대함은 베푸는 삶입니다. 그는 열한 번째 아들이지만 아버지를 잘 모셨습니다. 효도합니다. 르우벤과 다릅니다. 그가 힘이 있어서 그렇게 베풀고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밖에 없어도 나누어 반을 베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 개를 가져도 하나도 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형님들을 극진히 모시고 그 조카들까지 잘 보살핍니다. 50:21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통이 크고 마음이 넓습니다. 용서의 사람이고 베풀고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르우벤의 경우 아버지의 것까지 빼앗는 자였습니다. 자기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는 마음이야 얼마나 좁고 가난한 마음입니까? 이런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장자의 복을 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을 좇으십시오. 혈통으로 되지 않습니다. 장자답게 삽니다. 비록 11번째 아들이지만, 비록 동생이지만 형님 같은 마음으로 삽니다. 큰 그릇 되십시오. 나에게 무엇이 주어졌는가가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크고 넓은 마음을 준비하십시오. 그 그릇에 하나님의 복을 결국 담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태어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순서로 태어나느냐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삶을 가꾸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환경에 태어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환경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얼마나 현재 부자인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두 잃을 수 있습니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