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야 삽니다(열왕기상 16:15-20)
2011.05.17 07:32
살려야 삽니다!
열왕기상 16:15-20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이후 멸망 할 때까지 19명이 왕권을 이어왔는데 이 중 여덟 번의 반역을 통해 왕권이 교체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죽이고 죽는 왕들
첫 반역은 바아사가 일으켰습니다(15:28). 그는 여로보암 왕가를 무너뜨리고 왕이 되어 24년을 통치했고 그가 죽은 후 아들 엘라가 2년동안 왕권을 잇습니다. 그러나 다시 시므리가 엘라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면서(16:9-11) 바아사 왕가도 문을 닫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반역을 통해 왕이 된 시므리는 칠일 만에 무너집니다(15절). 이 시므리를 무너뜨린 자가 바로 그 유명한 아합 왕의 아버지인 오므리입니다(17-18절).
왜 이렇게 죽고 죽습니까?
탐욕입니다. 내가 살고, 내가 갖고, 내가 누리고 싶어 누군가를 죽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탐욕이 앞에서 죄악된 길을 가는 자들을 심판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19절). 그렇게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악한 자들은 또 다른 탐욕을 가진 악한 자들에 통해 심판을 받습니다. 죽인 자들은 또 누군가에게 죽습니다. 악순환이 계속되었습니다.
죽이면 죽습니다
죽이면 죽습니다. 죽인 자는 누군가 자신을 죽일까 걱정합니다.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은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성을 쌓아 자기를 방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인 자는 죽을까 걱정하여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
남을 죽이고 산 자는 불행합니다. 남의 눈물을 담보로 웃는 자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악한 자라도 죽이는 것으로 이길 수는 없습니다. 선으로만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국가적, 사회적 공의를 세우기 위해 공권력이 필요하지만 그것도 신중하고 정의롭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매우 위험한 일을 만들 수 있습니다.
911테러의 배후로 지목되어 추적당하던 오사마 빈 라덴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리 사회가 테러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았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죽이는 것으로 살 길을 찾으면 누군가가 또 죽이겠다고 달려들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죽이기보다 살리는 길을 찾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안전을 보장하는 그 방법이 우리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살리는 자가 살아남습니다.
결국 살리는 자가 살아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살리는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 언약대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즉각적인 죽음이 아닌 살길을 만들어주시면서 죄의 결과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성경의 역사는 인간을 죽음에서 살게 하신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완성하신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죽을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주시므로 우리에게 살 길을 주시고 그렇게 죽는 것 같지만 부활을 통해 죽어주는 것이 사는 길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죽여서 이기는 자보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살리는 자가 결국 복입니다.
오늘날 학교 교육조차 살벌한 생존경쟁의 치열한 싸움터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최근 서울지역의 어떤 고등학교의 살벌한 경쟁 교육 현장이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학교가 이기는 법을 가르치고 뒤처지면 패배라고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학교가 더불어 사는 법이 아닌 혼자만 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지만 왜 잡아야 하는지, 어떻게 나눠먹어야 하는지는 전혀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정글법칙만 존재합니다. 함께 사는 훈련을 시키지 않습니다. 이웃과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교육은 실용과 효율이라는 이름 앞에 무력해지고 있습니다.
경제를 살리는 것도, 서민을 살리고 소외된 사람을 살릴 수 있을 때 장기적으로 건강한 경제체질을 만듭니다. 시장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다 망하고 우리 회사만 살아남았다고 좋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큰일 납니다. 내 회사가 만든 물건을 살 힘을 가진 소비자가 없다면 함께 망할 날만 남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주 최부자집이 5백년 부자를 유지한 것은 소작농들을 살려준 것 때문입니다.
만석 이상은 모으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만석은 쌀 일만 가마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재산은 환원하는 것이고 환원방식은 소작료를 낮추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소작농들이 앞 다투어 최부자 집 논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작료가 낮아지니까. 주변에서 부자 되기를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그 집이 부자가 되도 배 아픈 가난한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없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그로인해 그 집은 안전을 보장받았습니다. 나그네를 잘 대접해서 인터넷을 비롯한 매체가 없던 때에 경주 최부자집 소문은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오랜 세월 부자로 사는 방법이 가난한 주변의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복을 받은 것은 죽이기보다 살리는 편에 섰기 때문입니다.
사울에 대해 그랬습니다. 사울의 군장도 살려 중용했습니다. 압살롬조차 살리라는 명령을 내렸고 압살롬의 군장도 살려 중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군사령관이었던 요압이 그들을 다 죽였습니다. 살리려던 다윗은 존귀한 삶을 누렸고 자기의 욕심을 위해 죽이는 삶을 살았던 요압의 말년은 비참했습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들 중 요셉을 죽이지 말자고 제안을 한 유다가 결국 최고의 복을 받았습니다.
창 37: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살리려고 하는 자가 복 받습니다.
죽이고 내가 복을 차지하려고 하는 자는 잃습니다.
남의 흠집 내서 내 유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결국 손해 보는 일입니다.
말을 해도 살리는 말 합시다.
죽이는 말 하지 맙시다. 상처주고 흉보고 흠집 잡는 말이 아닌 칭찬과 격려의 말로 생명의 역사를 펼쳐야 합니다.
내가 상대를 죽이려는 것을 알면 상대도 죽기 살기로 덤빕니다. 궁지에 몰린 죄가 고양이를 문다는 것입니다.
대북정책에서도 기억해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살리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상대를 죽여서 이기려고 하면 상대는 죽지 않으려고 버둥거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같이 죽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내가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상대가 알면 내가 위험해 집니다.
내가 죽어 너를 살리는 아름다움을 꿈꿉시다.
다시 반복하지만 주님은 자신을 죽여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내가 죽고 너를 살리는 삶은 결국 나를 살게 합니다.
농촌 교회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힘쓰는 이유가 이런 것입니다.
오늘 찬양대가 금지마을로 갔습니다. 찬양 구경도 하기 힘든 농촌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곳에 가서 함께 예배하고 찬양을 함께 하고 함께 식탁에 앉으며 격려하며 희망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농촌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처럼 힘을 가진 교회는 작고 힘없는 교회를 살리는 역할을 사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큰 교회에 치어 숨쉬기 어려워진 교회 환경을 개선해야 합니다.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 덩치에 치어 곁에서 죽어가고 있다면 고민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있습니다.
상생, 공생, 공존, 배려 등입니다.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테너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의 편지에 힘을 얻는 호세 카레라스(Jose Carreras)가 암투병에서 일어섭니다.
“당신이 없으면 나는 누구와 경쟁해야 하나”
함께 존재해야 서로 발전합니다. 건전한 경쟁은 한 쪽이 죽게 하지 않습니다.
다 죽고 나만 살아있는 세상을 상상해보십시오. 그 외로움에 미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 큰 형벌입니다. 죽이고 내가 살려고 하면 함께 죽습니다.
이기는 것이 복, 지는 것은 불신앙의 결과로 해석하려고 하지 맙시다. 죽는 것은 패배 사는 것이 복이라고 연결시키지 맙시다. 성경적으로, 그리고 주님이 보여주신 삶을 살아갑시다.
성경이 말하는 승리는 죄와 내 안에 있는 욕심과의 싸움에서 이김이지 누군가를 이기고 나 혼자 웃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 때문에 사는 사람이 많기를 바랍니다. 나 때문에 희망을 갖는 사람이 많기를 바랍니다. 내가 살리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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