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0일 월 / 로마서 1:28-32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은 자들 / 요한계시록 19-20장
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리를 거스르고 심판을 자초하며 살까요? 그것은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이 없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마음에서 밀어내고 삶의 현장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며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두지 않은 공간에는 온갖 죄악들이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불의와 추악한 죄들 그리고 살인과 분쟁 또 사기와 악독한 삶으로 세상을 더럽혔습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그들의 일처럼 했고 자비를 상실한 채 예배하는 척했습니다.
그럼에도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런 짓을 하는 다른 사람을 보면 죽어 마땅하다고 손가락질 하면서도 자기들이 그런 짓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가증스러웠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몸과 마음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입니다. 성전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내 마음과 몸 즉 삶에 성령이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는지요? 우리도 세상에 휩쓸려 살다 보니 내 삶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피고 경계해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은 계십니까?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것처럼 살고 있습니까?
12월 31일 화 / 로마서 2:1-3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자들 / 요한계시록 21-22장
바울 사도는 선민임을 자처하는 이스라엘에게 심각한 경고를 합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중요한 성경적 원리입니다. 남을 판단만 하는 자들, 자기들이 아는 율법과 지식으로 판단하기만 하는 그들이 저지른 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도 사실은 자기들도 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는 덮어두거나 합리화하고 남의 죄만 들여다보며 손가락질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심판을 받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산상설교에서 강조하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주님은 이어서 자기 눈 속에 들보부터 빼고 난 후에 남의 눈의 티를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도 이런 경고를 합니다. 만일 누군가의 범죄한 일이 드러난다면 “너 자신을 살펴” 보라는 것입니다(갈 6:1).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온 자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남의 죄만 보고 숨겨진 자기들의 죄를 못 보았다는 것입니다.
정죄와 판단을 일삼으며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손가락질 하는 자들은 언젠가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손가락질하는 일을 겪을 것입니다. 조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나를 살피는 것이 먼저입니다.
1월 1일 수 / 로마서 2:4-5 진노를 쌓는 자들 / 창세기 1-3장
이스라엘 백성이든 누구든 조심할 일이 있습니다. 죄를 쌓아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합니다. 죄가 쌓이면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소돔성이 무너진 이유는 더 이상 죄를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창 18:20).
죄를 짓지 않고 살기는 어렵지만 쌓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매일 해결하고 살면 됩니다. 매일 씻으면 됩니다. 매일 몸을 씻듯 내 마음과 삶의 구석구석에 쌓일 수 있는 죄를 청소해내야 합니다.
먼지 같고 쓰레기 같은 죄를 쌓지 않고 매일 씻고 청소하는 방법은 회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달을 때마다 회개하며 엎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큰 죄도 깨끗이 씻어주시며 기억조차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내 안에도 쌓고 하나님의 기억에도 쌓다 보면 죄의 무게에 스스로 붕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죄를 쌓으면 하나님의 진노도 쌓입니다. 한꺼번에 심판받으면 심각하게 인생은 무너지고 회복 불가능한 상태를 만나게 됩니다. 매일 깨끗이 씻으며 살아갑시다. 쌓아두므로 청소가 불가능해지거나 심판한 죄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1월 2일 목 / 로마서 2:6-11 행함과 보응 / 창세기 4-6장
하나님께서 주신 중요한 원칙,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가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것과 같습니다(갈 6:7-8). 우리가 뭔가를 할 때 나에게 하나님께서 그대로 해주셔도 좋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않아야 하며 내가 받고 싶은 것을 누군가에게 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걱정 없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욱 기대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의 쌓은 과거, 오랫동안 살아온 삶을 평가하십니다. 선을 행하면 선한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열매를 보장하십니다. 악을 행하면 악에 대한 부응만 있을 것입니다. 우리 속에 쌓인 악이나 그로 인해 행한 삶의 모든 행동은 반드시 그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오늘이 내일을 결정합니다. 올해가 내년을 결정합니다. 이 세상의 삶이 영원한 천국에서 누릴 하나님의 상급을 결정한다는 것은 매우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내일이 없는 듯 살아가는 사람은 미련한 인생입니다.
1월 3일 금 / 로마서 2:12-16 율법과 정죄 / 창세기 7-9장
바울 사도는 율법의 분명한 기능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의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 인간의 삶을 판단하는 유일한 잣대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기 마련입니다. 즉 완전하게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면 지키지 못한 것에 의해 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열 가지 가운데 아홉 가지는 다 지키고 한 가지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 한 가지로 인해 죄인이 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입니다. 한 가지든 두 가지든 지키지 못한 것은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정죄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율법 앞에서 온전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그 수준으로 삶을 격상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사람들은 어떨까요? 즉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은 율법 준수의 의무가 없으므로 정죄를 받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은 극히 상식적입니다. 상식대로 산다면 율법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자기 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율법과 같은 양심의 기준에 따라 정죄될 수 있습니다.
율법을 듣든지 상식을 가지고 살든지 지식이나 들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코 의로운 삶이 될 수 없습니다.
1월 4일 토 / 로마서 2:17-24 모순에 빠진 유대인들 / 창세기 10-13장
율법을 하나님의 법으로 믿는 유대인들의 역할이 나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비교할 때 율법을 아는 자요, 그것을 믿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율법을 모르는 자들에게 책임이 주어집니다. 모르는 자가 아닌 아는 자들은 아는 만큼의 책임이 부과되는 법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먼저 받고 믿고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그것을 모르는 자들에 대하여는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역할처럼 율법을 모르는 자들에게 바른길을 보여주고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또 다른 면에서는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 같은 역할도 해야 합니다. 결국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이스라엘을 먼저 택하시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믿고 가르치는 대로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갑니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자기들은 도둑질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거나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자기들은 도둑질도 하고 우상숭배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을 택하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믿고 아는 대로 바르게 살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신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명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