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0(월) / 예레미야 13:15-17 어둠이 오기 전 교만을 내려놓으라 / 시편 111-114편
교만해도 될 때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하지 말라”를 강조하시기 위해 그 앞뒤로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와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를 붙이십니다(15). 간절한 마음으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호소합니다.
살면서 ‘때’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유다에게도 때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 제한을 분명히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16)입니다.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이 무한하지 않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반드시 돌이켜야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 결국 심판을 초래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만큼 낮아져 있습니까? 하나님의 빛이 어둠이 되기 전에, 우리는 겸손히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희망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둠이 오기 전에 돌이키라고 경고하십니다. 회개는 여전히 가능합니다. 예레미야처럼 우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가까이 아는 사람입니다. 눈물로 기도하고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새 빛을 주십니다.
7/1(화) / 예레미야 13:18-21 내려진 영광의 면류관 / 시편 115-118편
왕과 왕후도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유다의 최고 권력층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곧 있으면 그들의 머리에서 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질 것입니다(18). 하나님의 통치권에 도전한 결과입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라도 하나님 손에 달려 있으며, 내려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졌다”는 말씀을 통해 인간의 영화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그들의 영광의 면류관을 지탱해 주던 성읍들은 봉쇄되고 남김없이 다 잡혀갑니다(19). 맡겨졌던 양 떼, 아름다운 양 떼로 비유되는 그처럼 자랑하던 백성들은 어디 갔는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20). 하나님께서는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21b) 물으십니다. “네가 손수 기른 자들이 너를 공격하고 지배하면”(21a,새번역).
인간적인 관계, 정치적 관계로 외세를 자신의 친구로 삼았습니다. 그것이 힘이고 자랑이었습니다. 마치 힘 있고, 권력 있는 이들을 자신의 황금 인맥처럼 자랑하고 애지중지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대신 많은 백성, 외세의 강한 나라들을 의지한 결과가 얼마나 허망한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우리 삶에도 은근히 하나님보다 자랑스러워하는 영광의 면류관은 무엇일까요? 많은 소유, 넓은 인맥, 높은 자리, 빛나는 업적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높아진 것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써야 할 진정한 영광의 면류관을 씁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가장 영광스럽고 높은 면류관입니다.
7/2(수) / 예레미야 13:22-27 변할 수 없는 죄성이라지만 / 시편 119편
하나님의 심판이 선언된 후에도 백성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네가 마음으로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닥쳤는고...”(22a). 심판이 닥쳤을 때조차 회개보다는 당황과 변명이 먼저 오는 깊은 죄성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답해주십니다. “내가 대답하마. 네 치마가 벗겨지고 네 몸이 폭행을 당한 것은, 바로 네가 저지른 많은 죄악 때문이다”(22b,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충격적 비유를 드십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자기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23a). “만약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죄악에 익숙해진 너희도 선을 행할 수가 있을 것이다”(23b, 새번역). 인간 스스로 바꿀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많은 죄악, 반복된 죄악은 삶 전체를 죄로 물들입니다. 결코 스스로 희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간음, 사악한 소리, 음란, 음행, 가증한 것” 등 죄를 보셨다 하시며 한탄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냐”(27). 이는 시간이 지나도 정결하게 되지 않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슬픔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며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우리도 구스인이 피부를 바꿀 수 없듯, 죄의 습관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변화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개입이 필요합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닥쳤는가!”를 고민하는 자가 아니라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그럴 때 치마가 얼굴에까지 들춰지는 수치가 아닌, 수치를 가리시고 의의 옷을 입혀주시는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구스인의 피부도, 표범의 반점도 변화시키는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7/3(목) / 예레미야 14:1-6 가뭄에 신음하는 땅과 짐승 / 시편 120-123편
죄악은 세상을 어떻게 만들까요? 하나님의 심판은 이제 자연재해의 모습으로 유다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상숭배의 간음은 남유다에 심각한 가뭄을 가져왔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왕 시절에도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가뭄이 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왕상 18:1). 가뭄은 자연재해이기도 하지만 성경에서는 종종 죄악과 연결된 재앙으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고 보존해야 할 인간이 죄로 망가지니 자연도 망가진 겁니다.
구체적인 고통스러운 가뭄의 모습이 나옵니다. 유다가 슬퍼하고 성문의 무리가 피곤해합니다. 땅 위에서 애통하고, 예루살렘에 부르짖음이 치솟습니다. 가뭄은 밭 가는 자들에게만 절망을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4), 귀인들도 사환을 보내지만 물을 얻지 못합니다(3). 사람만 고통받는 것이 아닙니다. 들의 암사슴에게도 비극은 찾아옵니다. 새끼를 먹일 풀이 없으니 새끼를 버립니다(5). 들 나귀들도 풀이 없어 승냥이처럼 헐떡이고 눈이 흐려집니다(6). 사도 바울이 전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8)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기상이변에 대해 사람들은 “탄소배출”을 말합니다. 탄소배출! 분명히 줄여야 합니다. 그러나 탄소배출도 욕심과 이기주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관점에서는 탄소배출만큼이나 “죄악 배출”을 줄여야 합니다 하는 것마다, 생각하는 것마다, 품는 마음마다 얼마나 많은 죄악들이 배출되고 있습니까! 자연 만물의 신음 속에는 더 이상 쌓일 곳 없이 채워진 죄악 배출도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 자연의 신음을 보며 내가 줄여야 할 탄소배출, 죄악 배출량을 줄여봅시다.
7/4(금) / 예레미야 14:7-12 공동체를 위한 탄원과 하나님의 공의 / 시편 124-127편
예레미야 선지자는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탄원합니다. 유다의 죄악이 많고 주께 범죄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7)라고 간구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어찌하여”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이 마치 “하룻밤 유숙하는 나그네처럼”(8), “놀란 자처럼,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처럼”(9) 보이시는지 묻습니다.
이러한 탄원은 하나님을 알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탄원할 근거도 모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전히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9)인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주목할 점은 예레미야가 자신을 유다와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유다의 한 지체로서 “우리의 죄악”이라며 공동체를 위해 간구합니다. 이는 우리도 가정, 교회, 사회를 위해 한 구성원으로서 함께 기도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예상과 다릅니다.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10). 더 충격적인 것은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11)는 명령입니다. 그들이 금식하고 번제와 소제를 드려도 받지 않고 오히려 멸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12).
이는 정작 당사자들은 간구하지 않고 예레미야만 간구하는 상황, 마음과 삶을 돌이키지 않고 종교적 형식만 남은 상황에서 불가피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누군가에게 기도 부탁을 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마음의 중심과 삶의 모습을 돌이켜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은 다른 이에게 나의 기도를 맡기지 말고 심판 중에서 소망을 버리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 나의 기도를 온전히 올려 드립시다.
7/5(토) / 예레미야 14:13-18 듣고 싶은 메시지와 들어야 할 진리 / 시편 128-131편
가뭄이 유다를 덮쳐 사람들은 물을 구할 수 없고, 동물들은 풀이 없어 새끼를 버리는 참혹한 상황입니다(3-6절).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거짓 선지자들은 “칼을 보지 않으며, 기근은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외칩니다. 메마른 땅에 거짓된 선포가 흙먼지처럼 사람들의 귀에 앉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13).
하나님께서 이에 분명히 밝히십니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14).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거짓 예언이 성행할까요?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악을 돌이킬 생각보다는 환난을 피하고 싶은 수요에 맞춰, “조작된 평강”을 전하는 공급이 일어납니다. 그 결과 거짓 예언을 전한 이들(15)과 그 예언을 믿은 백성(16) 모두 심판을 받게 됩니다.
거짓 평안을 선포한 자들에게 결국 칼과 기근이 임하고, 그들을 장사지낼 사람조차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특별히 가중처벌을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이 저지른 악을 그 위에 부으심”(16절)일 따름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모든 재앙을 바라보며 애통합니다. 들에는 칼에 죽은 자들, 성읍에는 기근으로 병든 자들이 보입니다. 선지자와 제사장도 어찌할 바를 몰라 온 땅을 헤멜 뿐입니다(18). 그러니 눈물이 밤낮으로 흘러 그치지 않습니다(17).
우리는 어떤 메시지를 듣고 싶어 합니까? “내가 원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내가 들어야 할 메시지”,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갈망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며 눈물 흘릴 수 있다면 감사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조작된 평강이 아닌 슬프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붙잡는 자를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