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9(월) 예레미야 51:33-44 바벨론, 벨이 무너지다 / 요한계시록 17-18장
바벨론에 대한 시온 주민의 고소가 이어집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약탈을 고소합니다. 빈 그릇이 되게 하고 자신의 좋은 음식으로 배채우는 큰 뱀처럼 삼켰음을 고발합니다(34). 또한 폭행과 학대에 대해 고발합니다(35). 그렇기에 자신들이 흘린 피가 그들에게 돌아가길 원합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심판의 도구가 그 주제를 잊어버린채 심판 그 이상의 악함을 저질렀습니다. 지금 당장은 그 힘 때문에 찍소리 못하는 듯 해도 그 억울함과 눈물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송사를 들으십니다.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위하여 보복하신다 말씀하십니다(36). 이제 바벨론을 위한 노래는 “애가”만 남을 뿐입니다. 41절처럼 “슬프다”만 남습니다. 바벨론으로 바닷물이 밀려오고, 파도 속에 잠기게 됩니다(42, 새번역). 더불어 바벨론이 섬기던 “벨”은 아무 것도 아닌 우상이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44).
벨은 그간 바벨론의 사고체계를 지지하는 종교였습니다. 힘으로 제압하고 누르며, 힘이 약한 민족과 나라는 삼켜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힘의 논리를 뒷받침했습니다. 그렇기에 정복한 나라들의 우상들을 벨 신전 앞에 진열시키고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힘과 정복의 논리를 좋아하는 세상 민족들이 벨에게 몰려갔었습니다(44b). 하지만 그런 벨과 바벨론은 무너집니다.
오늘 우리가 마음에 들어하는 생각이, 그리고 오늘 우리 사회가 마음에 들어하는 혹 벨에게 몰려들던 민족들의 생각은 아닐까요?
우리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해 봅시다.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고,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은 벨과 벨을 추종하는 바벨론의 생각과 너무나 다릅니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 벨이 아닌 우리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품고 오늘 우리 주위에 손 내밀어 잡아줄 이들이 누구인지 생각해 봅시다.
12/30(화) 예레미야 51:45-58 서성거리지 말고 떠나라 / 요한계시록 19-20장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바벨론에서 나와 각기 여호와의 진노를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45). 바벨론에는 내분이 일어나고, 우상들에게 벌이 내려지며, 죽임 당할 자들이 엎드러질 것입니다(47-49). 이제 바벨론에 소리가 들립니다. 승리의 소리가 아니라 부르짖는 소리요 파멸의 소리입니다(54). 교만과 자신감의 소리를 세상에 내질렀던 바벨론에, 원수들이 황폐하게 만드는 요란한 소리가 납니다(55). 하나님께서는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56). 고관과 용사들도 취하게 하시면 영원히 잠들고, 백성들의 수고가 헛되어 불탈 것입니다(57-58).
그러므로 칼을 피한 자들은 멈추지 말고 가야 합니다. 먼 곳으로 갈 방법은 여호와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50). 이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들”(히 11:16)의 삶입니다. 예루살렘을 마음에 둔다는 것은 과거의 실패에 발목 잡힌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포로들에게 예루살렘은 본향에 대한 그리움인 동시에 죄와 심판이 서린 아픈 기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매이지 말고 회복의 소망을 향해 나아가라 하십니다. 본향을 그리워하는 것, 그것이 나그네로 사는 방법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눈앞의 것에 매이고, 과거에 사로잡히는 존재입니다. 세상의 자랑과 교만함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 언저리를 서성거리기 쉽니다.
2025년, 그 동안 내 마음은 어디에서 서성이고 있었을까요? 내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 점검해 봅시다. 이제 본향을 사모하며 하나님께 마음을 더욱 둡시다.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그 도전을 깊게 생각하고 결단해 봅시다.
12/31(수) 예레미야 51:59-64 바벨론으로 말씀을 보내다 / 요한계시록 21-22장
유다 시드기야 왕 제 4년,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가는 스라야에게 바벨론 멸망의 메시지를 기록하여 전했습니다. 바벨론 한복판에서 그 말씀을 낭독하고,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강에 던지라는 행동 명령이었습니다(59-64). 그 시기는 바벨론이 가장 강성했던 때였습니다. 유다의 1차 포로들이 이미 끌려간 후였습니다. 바벨론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상황과 메시지가 너무나 어긋나 보입니다. 마치 다윗이 골리앗 앞에 물맷돌 다섯 개를 들고 섰던 것처럼 말입니다(삼상 17:40).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고 무모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일에는 헛수고가 없습니다. 그 선포는 반드시 성취됩니다.
우리도 때로 ‘지금은 아닌 것 같은’ 순간에 믿음을 이야기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세상이 강하게 보이고 진리가 무력해 보일 때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는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상황에 위축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믿음으로 나눠봅시다.
1/1(목) 예레미야 52:1-11 시드기야의 죽음 / 창세기 1-3장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최후를 보여줍니다. 바벨론에 의해 왕이되었지만 바벨론을 배반했습니다(3). 바벨론만 배반한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바벨론이 하나님의 도구이니 항복하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뜻을 정면으로 반박한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입니다(2). 바벨론 대항하여 2년 6개월여를 버텼지만 결국 예루살렘 성이 뚫리게 됩니다.
그들의 불순종에 은혜의 장막을 거두신 겁니다. 왕이 백성을 지키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이 백성들을 지키지 못합니다. 결국 시드기야가 밤을 틈타 아라바 쪽으로 도망칩니다(7). 하지만 여리고 평지에서 잡힙니다(8).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의 첫 시작이 여리고였는데, 이제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여리고에서 잡혀갑니다.
신명기 28장에 주신 말씀처럼 가나안 땅 자체가 하나님의 기업이요 그들의 안전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이 하나님께서 주신 그 땅을 하나님의 기업으로 만드는 겁니다.
이제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것처럼(창 3:24), 이제 시드기야와 유다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3). 결국 사로잡힌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의 주둔지가 있는 하맛 당 리블라에 끌려갑니다. 그곳에서 그의 눈 앞에서 아들들과 고관들이 죽습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이 뽑힙니다. 그가 이 땅에서 마지막 본 장면은 아들과 고관들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으로 끌려가 죽는 날 까지 옥에 갇힙니다(10-11).
그의 실명은 단지 육체적 실명이 아닙니다. 실상 이미 그는 실명해 있었습니다. 그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듣지 않고, 인간적 시각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가 마지막으로 봐야 할 것은 절망이었습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바라봅니까? 새해 첫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보며,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갑시다. 더불어 더욱 말씀 순종의 자리에 섭시다. 순종할 때 여리고를 넘었지만, 불순종할 때 여리고에서 잡혔음을 기억합시다. 순종으로 여리고를 넘는 복된 2026년을 맞이합시다.
1/2(금) 예레미야 52:12-23 무너진 것이 은혜이다 / 창세기 4-6장
바벨론 군대는 성전과 왕궁을 불살랐습니다. 모든 집과 고관의 집까지 불태우고 성벽을 헐었습니다(13-14). 성중에 남아 있던 백성과 항복한 자들을 사로잡아 갔고, 오직 가난한 백성만 남겨두었습니다(15-16). 기술자와 인재들은 모조리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지도층 인사 160명은 느부갓네살 왕 앞으로 끌려가 처형당했고, 세 차례에 걸쳐 4,600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24-30).
예루살렘은 완전히 재기불능 상태가 되었습니다. 성전도, 왕궁도, 성벽도 파괴되었고, 사람도, 지도자도 사라졌습니다.
특별히 성전이 무너진 것은 단지 건물의 붕괴나 정치적 멸망을 넘어선 사건입니다. 구약 전체에 걸쳐 있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상징이 무너진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두시겠다”(신 12:5, 왕상 8:29) 말씀하신 곳이고, 하나님과 백성들과의 관계가 연결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전이 불타고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졌습니다. 그간 유다는 “이곳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렘 7:4)는 보이는 건물을 자신들의 신앙의 보증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실제 그들의 모습은 우상숭배와 불순종, 거짓과 교만 등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성전의 불탐은 곧 무너질 것이 무너지고, 태워져야 할 것들을 태우신다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들과 언약관계를 이어가실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건물에 제한되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포로지에 회당을 만들며, 메시야를 더욱 소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도리어 무너진 것이 은혜입니다.
성전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종교적 외형은 있지만 그 속에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우리 마음 속에서 불태워져야 할 것들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벽돌을 쌓아올리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욱 순수하게 갈망하고 사랑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1/3(토) 예레미야 52:24-34 사로잡혀 가지만 / 창세기 7-9장
성전이 불탔습니다. 그리고 이제 대제사장은 물론 부제사장, 성전 문지기가 사로 잡힙니다(24). 더 이상 성전에 대한 희망을 걸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 안에 있던 사람들조차 잡힙니다. 군사 지휘관, 왕의 내시, 군 지휘관의 서기관, 평민들입니다(25). 잡힌 그들은 립나에서 처형됩니다(27). 성전만이 아닌 예루살렘 성 안에도 희망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의 마지막 부분은 느부갓네살이 세 번에 걸쳐 유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음을 기록합니다(28-30). 성경에서 종종 ‘셋’은 완결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바처럼 바벨론을 통한 유다 심판이 완전히 이뤄졌음을 드러냅니다. 이제 유다에는 바벨론이 남겨놓은 아주 가난한 이들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끝자락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희망의 서곡을 알립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직전 왕인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지 37년만에 석방됩니다(31). 그의 이름의 뜻처럼 여호와께서 세우십니다. 바벨론의 에윌므로닥이 친절하게 대해주며 바벨론에 있는 다른 왕들보다 더 높여줍니다(32). 항상 왕 앞에서 먹게 하였으며, 그가 죽는 날까지 날마다 쓸 것을 받았습니다(33-34). 이는 시드기야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더라”(11)와 대조됩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절망으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호야긴 왕을 통해 유다의 역사가 절망으로만 끝나지 않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를 통해 희망을 봅니다. 세상은 통계와 수치, 트렌드를 통해 교회의 절망을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세상의 통계와 전망에 갇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2026년 새롭게 세워가실 겁니다. 심지어 포로지 같은 상황에서도 날마다 쓸 것을 주시며, 높여주시며, 마침내 참된 자유와 부흥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새로운 희망을 갖고 2026년을 열어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