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무엇을 보실까?(마가복음 12:41-44)
2008.07.23 09:44
“주님은 무엇을 보실까?”
< 마가복음 12:41-44 >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서 가난한 과부를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무엇을 보시는가를 깨우쳐 줍니다.
“보실 새”
41절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주님은 우리를 보십니다. 보시고 정확하게 아시고 판단하시는 주님입니다.
시 138:6이나 139:1-4등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보시고 아시는 분임을 선언합니다. 멀리서도 보시고 우리의 생각까지 아신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주님께서 성전과 모든 사람들의 깊은 곳을 보셨습니다.
11: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 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11: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사람이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보는 사람이 있으면 자세가 달라집니다. 누군가 보는 것은 우리를 조심하게 합니다. 사람이 보는 것도 중요한데 주님께서 보신다는 생각 속에 살면 삶이 달라집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와 우리가 하는 일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모습, 찬송과 헌금하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의 상황과 형편을 보고 아십니다.
어떤 형편에서 드리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44절).
우리의 마음과 자세는 어떤지도 보고 정확하게 판단하십니다(43절).
이 과부가 주님께 인정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정확하게 보신 주님이 헌금에 대해 분명한 판단을 하셨습니다.
43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드렸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정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가난한 과부는 자기의 소유, 즉 생활비 전부를 넣었습니다.
44절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앞에서 본 말씀이 기억납니다.
30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다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다하고”와 과부가 드린 “전부”는 같은 단어입니다. 과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다하는” 자세로 “전부” 드린 것입니다.
과부가 드린 헌금 액수는 부자와 비교되지 않는 적은 것이었습니다.
두 렙돈, 한 고드란트입니다. 렙돈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통용되는 헬라의 가장 작은 화패 단위였습니다. 렙돈은 로마의 가장 작은 화패인 고드란트의 2분의 1에 해당됩니다. 이 고드란트는 참새 두 마리를 살 수 있는 앗사리온(마 10:29)의 4분의 1에 해당됩니다. 앗사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의 16분의 1입니다. 그러므로 렙돈은 노동자 하루 품삯의 128분의 1에 대당됩니다. 정확하게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환산하기 쉽지 않지만 매우 작은 금액임은 확실합니다. 그것이 이 과부의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그러니 이 과부가 얼마나 가난한 자인지 보여줍니다. 이렇게 적은 돈이지만 주님은 그것이 생활비 전부였기에 누구보다 큰돈이었습니다. 적지만 그 전부를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당시 헌금은 구제에 상당부분이 쓰여졌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나타난 제물과 헌물들은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활비와 함께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는 일에 쓰였습니다. 과부의 경우 구제 받을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드릴 수 있는 부자였습니다.
왜 “전부” 드릴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 대한 전적 신뢰입니다.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느냐, 물질을 신뢰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도 선지자의 말을 듣고 “전부” 드렸습니다(왕상 17:8-16).
엘리야 선지자 시대였습니다. 가난한 가운데 그는 마지막 남은 전부를 드렸고 하나님이 그와 그의 아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먹고 살게 하셨을 뿐 아니라 선지자까지 그 집에서 대접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전적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무조건적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전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맡기는 것입니다. 무조건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산상설교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욕심을 갖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욕심 낼 것조차 없는 가난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가난한 가운데서도 심령이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는 진정한 천국을 누리고 있었던 여인입니다.
형편이 어려워도 큰일 할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주님이 칭찬하는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돈을 벌어야 할 수 있고 많이 가져야 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시간이 없어도 일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드렸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형편 속에서 드렸느냐의 문제입니다. 액수나 수량이 아닌 형편에 따른 정성과 자세입니다. 시간이 많은 사람이 드리는 열 시간과 시간이 없는 사람이 드리는 한 시간은 분명히 상대평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평가를 하십니다. 우리는 상대평가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정확한 평가를 하기 어렵습니다.
부자란 많이 가진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부자는 가진 것에 얽어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가난이란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아직도 모자라게 느낀다면 그는 가난한 자입니다.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쓸 수 있는 상태가 부자입니다.
우리가 부자인가, 가난한 자인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가운데서 어떻게 사느냐 입니다. 어떤 자세로 섬기냐의 문제입니다. 부자인데 가난하게 살기도 하고 가난한데 부자로 살 수 있습니다. 가난한데 큰일하고 부잔데 전혀 할 일 못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전부 다 주신 주님을 생각합시다.
마지막으로 이 십자가를 앞에 둔 주님의 깨우침 앞에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어떻게 하셨는지를 생각합시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봐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가장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앞으로도 얼마든지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롬 8:32).
우리의 예배, 우리의 섬김, 우리의 헌금 모두 주님이 보십니다. 그 중심을 보십니다. 어떤 마음으로 드리는가에 무게를 두어야 합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얼마냐, 양이 아닙니다. 그것에 담긴 우리 마음의 무게입니다.
우리의 오늘 들리는 예배를 주님은 어떻게 보셨을지 생각합시다. 찬양대가 드린 찬양을 어떻게 평가하셨을까요? 우리의 마음 자세에 얼마쯤의 점수를 주셨을까요?
제 스스로 묻습니다. 예배를 위한 준비, 이 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위한 준비와 열정을 주님은 어떻게 평가 하실 지를. 제가 준비하는 과정과 열정과 정성을 모두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