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의 제자들 (마가복음 14:43-52)
2008.09.09 12:10
“그날 밤의 제자들”
< 마가복음 14:43-52 >
드디어 주님이 붙잡힙니다. 바로 그날 밤에 제자들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바르게 살고 있는지 점검합시다.
입을 맞추는 제자
그날 밤에 유다가 찾아왔습니다. 대제사장이 보낸 주님을 잡기 위해 무장한 자들과 함께 왔습니다. 그들은 미리 약속을 했습니다. 유다가 입 맞추는 사람을 잡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주님께 입 맞춥니다(43-45절).
입맞춤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정중한 인사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습니다. 유다의 이 입맞춤은 배신의 입맞춤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아는 주님으로서는 참 역겨운 일입니다.
유다의 이런 입맞춤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 가룟 유다는 앞에서 본 한 여인의 향유 헌신을 비난했던 사람입니다.
14장에서 아름다운 헌신을 하는 여인에게 그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는 것이 낫다는 말을 한 사람은 요한복음의 보도에 의하면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런 말을 한 이유는 정말 가난한 자들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돈을 탐냈기 때문이었습니다(요 12:4-6). 이렇게 이중적인 자세, 표리부동이 가룟 유다입니다.
주님을 따랐지만 대가를 바라고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바라던 대로 되지 않자 그 분을 입맞춤으로 팔아 버리고 더러운 탐욕을 채웠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입맞춤은 없는지 생각합시다.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찬송하고, 신앙의 여러 표현을 하고 그렇게 주님께 입 맞추지만 세상과 또 손잡고 세상의 이익에 주님을 뒤로 해버리는 일들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이 이 사람과 내일은 저 사람과 입 맞춘다면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우리가 세상과 주님을 번갈아 가면서 입 맞추고 있지는 않은지요?
예배는 하나님께 입맞추는 것입니다. 헌금과 여러 모습은 섬김이 다 그렇습니다. 왜 그것을 합니까? 예배나 모든 섬김은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가 커서 예배할 수밖에 없고 헌금을 드릴 수밖에 없는 그런 마음의 표현입니다.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받은 것이 너무 크기에 감사함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의도를 갖으면 시험에 빠집니다.
초보적인 신앙에서는 기대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제자의 모습은 아닙니다. 군중으로 살 때, 무리로 있을 때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제자라면 구원의 감격 때문에 예배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총과 사랑에 감격하여 드릴 뿐입니다.
신앙생활하다가 시험에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그렇게 많이 예배 드렸고 봉사를 했는데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내가 십일조를 드렸는데도 왜 사업이 잘 안되고 왜 수입이 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 시험에 빠집니다. 이것은 순수하게 드린 적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늘 대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입 맞춘 것입니다.
이중적인 태도는 세상적 흐름입니다.
세상도 놓지 못하고 주님도 붙잡고 살아갑니다. 이중적인 자세로 순수함이 없는 삶은 유다와 같은 자리로 나갈 위험이 있습니다.
칼을 휘두르는 제자
47절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 뜨리니라”
이 제자는 주님을 위하는 열정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칼을 휘두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제자는 바로 베드로였습니다(요18:10). 그가 왜 칼을 지니고 다녔는지는 모르지만 가지고 있던 칼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가 사용한 칼은 주님을 잡으러 온 자들이 지니고 있던 무기 중 하나와 같습니다. 43절에 주님을 잡으러 온 자들이 검과 몽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편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대할 때 세상과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손잡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방법으로 세상을 이기려고 합니다. 내가 이겨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손에서 칼을 놓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주님의 방법이 아닌 세상의 방법으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미워하는 자를 함께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원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칼로 칼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정리를 잘 해주었습니다.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주님의 말씀은 칼을 손에 쥐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칼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제자 베드로는 늘 칼을 가지고 다니다가 그 칼을 사용하고 맙니다.
마 26: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주님도 무력 동원이 가능했습니다.
마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그러나 주님은 그 물리적 힘을 동원하시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도 칼을 늘 소지하고 다닐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비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쥐고 있던 칼을 휘두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이익을 챙기고 조금도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칼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제자는 손에 칼을 쥐고 살지 않습니다. 따뜻한 가슴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에 세상을 바꾸는 진정한 힘입니다.
버리고 도망하는 제자
또 다른 모습을 봅시다. 모든 제자들은 도망합니다.
50-52절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이들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유익일 때 주님을 쫓아다녔고 주님이 영광 받을 때 어깨를 으쓱거렸고 주님을 환호하는 무리 앞에서는 얼굴을 알리려고 애썼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불리해지니 버리고 도망합니다.
한 청년은 옷을 벗고 도망합니다. 위험해지니까 체면도 위신도 없습니다. 벌거벗고라도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벌거벗은 모습은 아닐까요? 속이 다 드러나 보여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서도 거룩한 척 하고 주님으로부터는 멀리 도망쳐 있으면서도 여전히 주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을 버리고 양심을 버리고라도 살 길 찾아 갑니다.
신사참배 반대로 위험에 처할 때 한국교회는 주님을 버리고 살 길 찾아 도망했습니다. 차라리 멀리 도망하면 좋을 텐데 현실 속에 주저앉아 교회를 스스로 무너뜨렸습니다.
우리 교단 27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가결합니다. 그해 1938년은 주기철 목사님께서 신사참배 반대로 구속되기 시작한 해였습니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과연 어떤지요?
이제는 자발적인 신사참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위협이 없어도 스스로 내 살길 찾고 내 이익 찾아 도망 다니는 것은 아닌지요? 살기 위해서도 아니고 더 많이 갖기 위해 주님을 스스로 버리고 도망합니다. 벌거벗은 모습을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어떻습니까?
주님은 성경을 이루는 것,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에 자신에게 어떤 손해가 와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칼을 휘둘러 대적들과 맞서지도 않습니다. 도망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제자의 자세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손해를 볼지언정 죽을지언정 제자란 묵묵히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결코 패배가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