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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이 선치 못하도다(삼상26:12-16)

2004.09.10 09:28

관리자 조회 수:1995

 

“이 일이 선치 못하도다”

< 사무엘상 26:12-16 >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의 물병과 창만 가지고 나온 다윗이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을 책망한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넬을 향한 책망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산꼭대기에 선 다윗

13절, “이에 다윗이 건너편으로 가서 멀리 산꼭대기에 서니 상거가 멀더라”

다윗은 산꼭대기에서 아브넬을 책망했습니다.

꼭대기는 그냥 물리적 위치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영적 우월성, 도덕적 우월을 보여줍니다. 영적으로 높은 곳에 서고 도덕적으로 더 훌륭하지 못하면 남을 책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그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곳이 산 위입니다. 주님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요한 원리를 설교하신 곳 역시 산입니다. 우리에게 영적 수준을 높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높은 곳에 서서 이 세상을 향해 선지자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죄악에 대해 책망해야 합니다.

선악에 대한 분별

16절 “네 행한 이 일이 선치 못하도다

다윗은 아브넬을 향해 말합니다.

“네가 선하지 못하다”

아브넬은 군대장관입니다. 그는 힘을 가진 자입니다. 권력을 지닌 높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가 선하냐, 악하냐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왕상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식만 가지고는 어떻게 더 돈을 벌까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것이 돈이 되더라도 그것이 정말 선한 것인지를 판단하게 됩니다.

이해관계를 판단하는 것이 우선되면 안됩니다. 얼마나 이익인가, 얼마나 손해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닙니다. 선악을 먼저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악의 기준이 상대화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선에 대한 절대기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문학 작품이나 영화의 주제가 권선징악이었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주제는 촌스럽게 취급됩니다. 오히려 악한 자가 성공하는 모습을 멋지게 그리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 사람마다 상대적 선에 빠져 있습니다.

내게 좋아야 선이고 내게 유리해야 선이라는 생각이 이 세상을 휩쓸고 있습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나쁜 사람은 사실은 나와 다르거나 나의 이익에 반하거나 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좋은 나라, 나쁜 나라의 기준도 경제적으로 이로운가를 가지고 따지는 세상이 된지 오래입니다.

선한 삶을 살았기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성공했기에 선으로 인정되는 그런 왜곡된 가치관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적 선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약4:17).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높은 곳에 섭시다.

너는 죽을 자로다

16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니라”

선하지 못하면 죽습니다.

악에 머물러 있으면 죽습니다. 반드시 죽습니다. 악에서 돌이켜야 살 수 있습니다(겔33:11).

선을 행할 줄 모르면 살아있어도 죽은 자입니다. 선을 행하는 살아있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잠을 잔 아브넬은 선하지 못했습니다

아브넬은 왜 선하지 않은 자로 평가되었습니까?

그는 사명을 망각했습니다.

사울을 지키지 못하므로 사울이 죽은 뻔 했습니다.

군대장관으로서 그는 사울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잊고 있습니다.

그 사명을 가슴에 새기지 못했습니다.

사명을 위해 그는 깨어 있어야 했습니다.

사울이 잠들었을 때 아브넬을 비롯한 사울을 지켜야 할 모든 사람들이 잠을 잤습니다.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사울왕을 지키려면 잠을 자서는 안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런 책망을 받지 않는지 생각합시다.

지금은 어떤 때입니까? 잘 때입니까?

아니면 깨어 기도할 때입니까?

우리도 잠자면서 핑계는 늘 있습니다. 너무 피곤합니다. 너무 분주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의 잠자는 것이 인정되지는 않습니다.

제자들은 졸며 자다가 주님의 걱정을 들어야 했습니다.

자야 할 때와 깨야 할 때를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적극적으로 빛이 되지 못하고 깨어 한 시대를 책임지지 못하는 것 자체가 선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깨어야 합니다.

주님은 늘 깨어 깨셨습니다.

그가 없이는 만물이 지은 것이 없는 바로 그 주님이 늘 깨어 기도하시면서 그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도 기도하면서 이길 힘을 얻으셨습니다.

우리가 잠자면서 인생을 성공적으로 세워갈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기도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활력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교회는 다음 주간부터 특별히 기도하는 기간으로 잡았습니다.

부흥회로 이어질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선한 일에 더욱 힘쓸 수 있는 활력을 찾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잠을 자는 어두운 시간에도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왕도 자고 군인도 자고 이웃들이 모두 자도 우리는 깨어 기도하는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선하지 못하다고 책망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파수꾼으로 부름 받았고 세움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 선입니다.

주님이 나를 세운 자리를 지키고 그 자리에서 깨어 기도하며 영적 파수꾼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