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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삼상31:7-13)

2004.11.04 05:58

관리자 조회 수:2671

 

“아름다운 마무리”

< 사무엘상 31:7-13 >

지난주에 우리는 사울의 슬픈 결말을 보았습니다.

죄의 결과, 하나님을 떠난 자의 슬픈 결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잘 섬기다가 말년이 불행하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사무엘상이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봅니다.

죽은 후에도 능욕 당하는 사울

지난주에 살폈지만 그는 죽은 후에 조차 그 시신이 블레셋의 군사들에게 의해 능멸을 당했습니다(7-10절). 블레셋은 사울의 머리를 베고 사울과 그 세 아들들의 시신을 그들이 정복한 벧산 성벽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블레셋의 다곤 신전에 두었으며(대상10:10) 사울의 갑옷은 승리의 기념물로 아스다롯 신전으로 보내졌습니다.

죽음이 복 되어야 합니다. 원래 성경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되다고 말씀합니다(계14:13). 주 안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죽음조차 복입니다. 우리들의 죽음도 복되게 하십시오.

사무엘상을 마치면서 사울의 죽음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울의 비참한 죽음은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왕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8장을 돌아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벌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왕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는데 백성들은 주변 나라들처럼 자기들도 왕이 있어야겠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열방처럼 되고 싶어 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열방과는 달라야 하는데 세상을 부러워하고 닮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다른 것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너무 다르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이런 백성들의 요구에 사무엘은 몹시 섭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사무엘을 버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삼상8:7).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면서 자기들의 욕심을 관철시킨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정은 하나님을 버리면서 세상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왕정이 복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얻어낸 것들이 결국은 복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사울왕의 비참한 결말입니다.

우리의 욕심으로 갖게 된 것은 결국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픔을 줍니다. 조심하십시오.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붙잡으십시오.

사울의 장례를 치러준 사람들

이렇게 사울이 슬픈 결말을 우리에게 보여주므로 사무엘상은 하마터면 끔찍한 장면으로 마무리될 뻔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사무엘상은 아름다운 한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울의 장례식을 치른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11-13절은 보면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사울의 소식을 듣고 그와 세 아들의 시신을 장례 치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구도 돌 볼 사람이 없는 중에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그 일을 담당해주었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사울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20여 km나 되는 거리를 밤새 달려가서 블레셋이 점령한 성벽에 매달린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매우 위험하고 힘든 일을 했습니다. 더욱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던 사울이 죽어 이제는 대세가 다윗에게 기울고 다윗의 시대가 동터오는 때에 다윗의 대적을 장례 치러주는 것은 매우 큰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은 일입니다.

이렇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위함을 감수한 채 사울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지러준 이유가 무엇일까요?

11장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11장에 의하면 길르앗 야베스가 암몬의 공격을 받아 어려움에 처한 적이 있었는데 그 위험에서 길르앗 야베스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선택된 직후 아직 즉위하기 전의 일입니다. 사울에게 은혜를 입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에 대해 그 고마움을 잊지 않았고 이렇게 보은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4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40년 전 사울의 은혜를 직접 입은 사람들은 많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고 지금 사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뽑힌 장사들이란 그 때는 어린 아이였거나 태어나지도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울의 은혜를 가슴에 간작했습니다. 대를 이어 간직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사울을 돌아보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은 사울의 시신을 거두어주었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어떤 보상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화를 입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보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들은 은혜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갚을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잊는 것은 짐승과 같습니다.

보상받는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

후에 이들은 보상을 받습니다. 바로 사울의 대적이었던 다윗에 의해 칭찬을 받았습니다. 다윗의 유다의 왕으로 즉위한 후 이런 소식을 들었습니다(삼하 2:4-7).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칭찬하고 보상했습니다.

다윗이 참 큰 인물임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사자를 보냈습니다. 직접 특사를 보내 그들을 격려하고 칭찬하였습니다.

은혜를 베풀면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에게 보답했는데 그 보상은 다윗에게서 왔습니다. 힘 있는 왕이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선한 일들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때로는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봉사의 대상에게서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이 헛되지 않게 하십니다.

잠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특히 사울처럼 누구도 돌볼 사람이 없을 때 돌보는 것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사울의 경우 사울의 세 사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사울에게 대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보은이 아름답게 사무엘상을 마감하게 합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사무엘상은 아주 무겁게 끝이 날 뻔 했습니다. 사울의 비참한 죽음으로 마감할 뻔 한 사무엘상이 이렇게 야베스 사람들의 이야기로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삽화를 사무엘상의 마지막으로 그려주고 있는 것은 참 다행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정 없이 메마르며 멋없고 살벌하더라도 우리는 그 세상의 한 구석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려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네에는 비록 악한 자에게라도 이런 사랑을 베풀고 끔찍한 사회로 변할지라도 우리들의 마음은 넉넉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이렇게 사는 분들이 있군요”라고 세상이 말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세상에 나가 아름다운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