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습니다!
창세기 4:1-2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의 첫 사건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담과 하와의 첫 출산이야기입니다.
거두지 않으신 은혜
1절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하와의 임신과 출산을 보여줍니다. 하나뿐 아닙니다. 2절에도 또 낳습니다. 어디 둘 뿐 이겠습니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자녀들이 있습니다.
1장에서 하나님은 창조된 인간에게 복을 주셨고 그 인간이 3장에서 범죄합니다. 그런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났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 됩니다. 그 은혜와 복을 거두지 않습니다. 1장에서 선언하신 복이 인간에게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문제지 하나님은 그 복을 거두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해도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게 배신을 안겨주시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약속하신 출산의 복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거두지 않았습니다. 단지 죄로 인하여 출산의 고통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출산의 고통은 있으나 생육하는 복은 이어졌습니다.
출산의 고통은 있어도 그 출산으로 인한 기쁨은 고통을 뛰어넘게 하신 것이 은혜입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와가 아이를 낳은 후의 고백이 나옵니다.
1절,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핵심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로 말미암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의 근원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근원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모든 것의 근원을 아는 것이 복입니다.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의 근원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애를 써도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근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녀를 얻는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창세기에서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았습니다. 그는 결코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삭을 낳습니다(18:11-12).
이삭이 야곱을 낳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삭은 40세에 결혼하고 아내가 임신을 하지 못하자 기도합니다. 그 간구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출산의 기쁨을 안겨주십니다(25:20-21).
야곱도 열 두 아들 중 창세기의 중심인물이 요셉을 낳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어머니 라헬은 자식을 낳지 못해 불평하자 야곱은 라헬을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30:1-2).
창세기에 나오는 중요한 인물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과 관련한 출산 이야기는 이렇게 신비한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나옵니다.
이 족보의 특징은 마태복음과 달리 계속 위로 올라갑니다. 올라가고 또 올라가면 결국 하나님께로 귀결됩니다(눅 3:38).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을 때
그러나 창세기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사람으로 말미암아 뭔가를 이루려할 때 일어나는 부작용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자식 낳기를 10년 동안 기다리던 아브라함과 사라는 지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제안한 것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였고 그것은 아브라함이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아닌 여종으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겠다는 사라의 계획은 매우 효과적이고 실용적이었습니다. 즉각적으로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공은 엄청난 부작용이 뒤따랐습니다. 집안에 큰 걱정과 근심이 가득하게 되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이삭이 태어난 후에도 그것이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또 창세기에 기가 막힌 사건이 있습니다. 부끄러워 입에 담기도 힘든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성에서 두 딸과 함께 겨우 살아남은 후에 두 딸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방법으로 말미암아 자식을 낳습니다.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창 19:32,34)고 합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 모압과 암몬 족속이 이어지고 그 후손들은 이스라엘 총회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신 23:3).
야곱의 아들 유다의 후손은 또 어떻게 이어집니까?
마태복음에 나오는 족보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유다의 후손은 그 며느리 다말이 시아버지로 말미암아 자식을 낳았던 것입니다(창 38:18,25).
매우 부끄러운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야 할 것을 인간의 방법과 그 힘으로 해보려고 여기 저기 기웃거리고 이곳 저곳 가보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모든 것의 진정한 “말미암아”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이 세상 모든 것이 그 분으로 말미암았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구원도 오직 그 분으로 말미암습니다(요 14:6).
바울 사도의 선언을 봅시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들이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들의 사명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을 알게 된 우리들이 지켜야 할 사명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놀라운 일을 나로 말미암아 이루어가는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로 말미암아 그리고 바울 사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사람에게 다스리도록 임무를 주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로 말미암아 이 땅에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내가 그 분의 손이 되어지고 그 분이 원하시는 곳에 달려가는 발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돈, 나의 재능, 나의 자녀들이 그 분이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이루어가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내 돈으로 말미암아 농촌교회가 일어서고 내 돈으로 말미암아 캄보디아에 물이 공급됩니다. 나의 눈물과 나눔, 섬김과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큰일이 펼쳐지기를 기도하고 꿈꿉시다. 이것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고백할 것입니다.
가장 슬프고 답답한 것을 교회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고 슬픈 일입니다. 우리들이 누구입니까? 우리들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할텐데 우리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것은 죄악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말미암아 큰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건강한 “말미암아”를 유지합시다. 나의 근원을 알고 나를 근원으로 또 놀라운 일을 펼치실 하나님을 바라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