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질문
창세기 4:9-12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9절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런데 3장 9절에도 하나님의 질문이 있습니다. 아담에게 던지신 질문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주시는 두 가지 중요한 질문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먼저 3장의 질문을 봅시다.
죄를 짓고 하나님이 무서워 피하여 숨은 아담에게 주시는 질문입니다.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숨어있는 아담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물으셨을까요?
아담의 정체와 현재의 영적 상태를 확인하시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손수 귀하게 창조하신 아담이 낯설었습니다.
너 아담 맞냐? 내가 창조한 그 아담은 어디 있니?
고귀하게 창조한 그 아담은 어디있냐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 일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부모들이 아이들을 정성껏 잘 키웠습니다.
그런데 다 자랐는데 내 아이 같지 않습니다.
‘내 아들은 어디 있지, 내 딸은 어디 있지’ 생긴 것은 내 아들이고 딸 같은데 아무리 봐도 내 아들도, 딸도 아닌 것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한 10년쯤 지났는데 ‘당신은 어디 있는지’ 찾기 어려워집니다. 이 사람이 그 사람 맞는지? 이런 허탈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담을 보시면서 그런 생각을 하셨고 그 의미를 이 질문에 담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질문을 받고 있습니다.
난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내 자리가 아닌데 거기 자릴 잡습니다.
내 길이 아닌데 가고 있습니다.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를 향해 묻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냐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느냐’입니다. 어디로 방향을 잡았냐고 묻습니다.
교회에 앉아있지만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한국 땅을 뒤지고 다니시면서 “교회야 넌 어디있니?”라고 물으실때, 아무리 봐도 교회는 없어서 답답해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 탑은 곳곳에 많은데 진정한 교회는 보이지 않습니다. 화려한 건물이 많은데 교회가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야, 넌 있기나 하냐?”
우리가 주님 앞에 갔는데 주님이 묻습니다.
“넌 어디 있다 왔니? 뭘 하다 왔니?”
“주님 내가 목산데요, 얼마나 많은 일했는데요”
“얼마나 큰 교회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모았는데요”
주님이 “글쎄 난 널 못봤는데, 네가 있기를 원하는 자리에 넌 한 번도 있지 않았는데”라고 하신다면?
우리는 어디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자리에 있습니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4장에서는 아담의 아들 가인에게 질문하셨습니다.
9절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두 질문의 공통점은 이 질문이 모두 어디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지고 어디 있느냐는 의미는 현재의 형편, 내가 서야 할 자리, 내가 가는 길을 살펴보게 하는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이웃을 돌아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형제인데 돌보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형편에 있는지 살피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그가 얼마나 아플지 생각하지 못합니다.
내가 많이 가지면 그는 상대적으로 적게 가질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우리 북한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들 중에 굶주려 죽은 자들이 어디 있냐고 묻습니다.
탈북자들이 어디 있냐고 묻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돈이 없어 공부하지 못하고 밥을 먹지 못하는 이웃을 아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들이 지금 어떤 형편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우같은 농어촌교회를 위해 애쓰는 것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올림픽에 환호하던 우리들이 장애인 올림픽에는 관심이 있는지요?
착한 소비를 하고 계십니까? 커피를 마실 때 우리에게 커피는 기호식품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존이 달려 있는 것임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작은 구멍가게의 애환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이 내 아우입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런 질문을 받은 가인은 뻔뻔합니다.
9절하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자기가 죽이고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큰소리 칩니다.
‘왜 내게 동생 안부를 묻습니까?’
‘내가 알 바 아닙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린 ‘내가 죽이지 않았다’ 또는 ‘내 책임 아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내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가난은 나라님도 구하지 못하는 것인데요’
이렇게 대답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 묻습니다.
왜 나에게? 내가 그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의 이웃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우의 핏소리를 들으셨습니다.
10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구도 모르게 일어난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 억울한 핏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고통당하는 사람의 핏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우리의 무관심 속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의 절규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디 있냐고 물으십니다. 우리들에게 책임을 지우십니다.
내가 죽이지 않았어도 내가 침묵하는 동안 죽는 아벨도 있습니다.
내가 내 일에 바쁘게 사는 동안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살고 싶어 발버둥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합시다. 나는 어디 있는지? 내 아우는 어디 있는지?
그래서 우리 자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나 혼자 배부른데 주변이 다 굶고 있다면 매우 위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