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 사는 복
창세기 5:1-5
5장에서 아담의 족보를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이 족보에 사람의 가치를 보여줍니다.
사람으로 사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없음을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
1절은 사람의 가치를 보여줍니다.
1절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사람의 근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아울러 사람의 본질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양대로”입니다.
사람의 모양이 어떤 피조물에 비해서 결코 빠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하나님의 모양이 그 속에 담겼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의 모양을 찾아내야 하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모양이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사람으로 사는 복
하나님의 그 모양대로 창조된 사람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2절,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우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입니다.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복입니다. 하나님이 창조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사람”이라고 일컬어주셨습니다.
사람만이 고귀한 존재입니다. 아담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각각의 역할과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들풀도 아름답고 하늘을 나는 새도 귀한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이라니요? 이것은 놀라운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벨을 죽인 것은 매우 심각한 죄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아벨을 죽인 가인조차 함부로 누군가 해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람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다울 때 더욱 가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실 때 천사나 어떤 신비한 모습이 아닌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다는 것은 사람이 그만큼 가치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차별 받는 사람,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에게 친구처럼 다가 가셨습니다.
세상이 좋아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경제 발전, 과학 문명의 발전일까요?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다면 결코 좋은 세상은 아닙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쉬운 이념이 보편화한 것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사람이 누구나 평등하다는 이 쉬운 명제가 모든 사람에게 인식되는데 이렇게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피부색, 언어, 문화 등으로 인해 사람이 차별받지 않게 된 것도 20세기 일입니다. 노예해방도 20세기 일입니다. 여성에 대한 배려를 하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사람을 사람인 것만으로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도 차별이 만연합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국적이나 인종차별이 여전하고 남녀차별이 존재하고 종교적으로 차별당한다면 불행한 세상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생긴 것 때문에 성적 때문에 말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차별받고 왕따를 당하는 한 우리 사회는 후진적 사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이라도 귀한 존재라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무시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은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경스런 죄입니다.
교회 와서 밥을 먹는 분들이 계십니다. 냄새도 나고 때론 비이성적인 행동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을 사람 대접해주면 언젠가는 사람답게 살 것입니다. 사람 대접 받아본 적이 없어 스스로 사람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불행한 일을 이젠 막아야 합니다.
목회가 행복한 이유는 사람을 섬기는 최고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고 격려하는 역할이기에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것입니다.
아담이 낳은 아들
3절에서 아담은 자기 모양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1절의 하나님의 모양과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양대로 아담을 만드셨는데 아담은 타락한 죄성을 지닌 인간의 모양을 닮은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 닮은 자녀를 낳습니다.
그러기에 나를 닮아도 괜찮을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닮으면 내 자녀도 하나님을 닮은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지었지만 인간이 죄를 지으므로 죄성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그대로 유전되는 것입니다. 죄인으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을 봅시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것은 부모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문제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아담의 모양이 유전되었습니다.
그것을 끊어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죄의 쓴 뿌리’로부터 자유를 얻을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셋으로 이어지는 족보
3절에서 다시 사람의 가치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3절,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우리는 4장에서 아담이 가인을 낳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셋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가인이 죽인 아벨대신 주신 아들입니다.
가인이 먼저 태어났기에 가인이 족보에 당연히 나와야 할 텐데 그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가인은 이렇게 역사의 곁가지로 사라집니다. 아무리 힘이 있어도 결국은 사라집니다. 악한 자가 힘을 가지고 세상을 움직이고 차지하는 것 같아도 결국 사라집니다.
‘얼마나 힘이 있는가’가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번 것이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매겨진 서열순도 아닙니다.
예배자가 역사를 잇습니다. 사람다운 사람 셋이 역사에 남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장자라고 무조건 복을 받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장자가 아니고 열두 지파 중 가장 복 받은 유다의 경우 넷째 아들이었습니다.
그 유다 지파 중 왕가를 이룬 다윗은 여덟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복 받은 것은 바로 사람다운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드러낸 결정적인 모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사는 것은 복입니다.
굉장한 일을 하지 못하고 유명한 인물이 되지 못해도 사람답게 사는 것이 복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복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사람으로 사는 복을 잃습니다.
사람답게 살 때 비로소 사람으로 사는 것이 복이 됩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사람의 역사입니다.
결국 사람답게 사는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경외하고 예배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삶입니다. 누구라도 존중해주는 사람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시고 역사를 움직이는 사람 되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