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예배자
창세기 4:2-8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갈 길을 만들어주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나무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였고 오늘의 예배입니다.
예배를 가르치는 가정
본문에서 아담의 두 아들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아담과 하와를 통해 제사를 배웠을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예배를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가정에서 예배를 가르치십시오. 예배하면서 성장하게 하십시오. 예배하는 자로 키우셔야 합니다.
예배를 실패한 아들은 병든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바르게 드린 아벨은 죽었지만 살았고 그를 이은 셋을 통해 예배자의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미 서구교회들이 예배를 잃어버리고 무너졌습니다. 한국교회가 이 땅에 살아있기를 원한다면 예배를 지켜야 합니다.
두 예배자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두 사람이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두 예배자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기에 두 예배자입니다.
예배의 결과가 다릅니다.
3-5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고 아벨의 예배는 받으셨습니다.
예배의 성공과 실패는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얼마나 멋지게 드리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수백 번 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은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면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모든 신앙행위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지, 기억하시는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사도행전의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구제와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고 인증해 주셨습니다(행 10:4).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행위를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진정한 신앙입니다.
가인과 아벨
그러면 어떤 예배를 받으실까요?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고 “가인과 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4-5절).
그들이 드린 제물이 아닙니다.
가인 자신, 그리고 아벨 자신이 중요했습니다.
내가 드리면 받지 않고 옆에 사람이 드리면 받는 경우, 그것은 ‘나’라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선물을 해도 내 선물이 더 비싼 것인데 선물 받는 사람이 기뻐하지 않고 받기를 거절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나와 선물 받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뭘 해도 기뻐하고 받는 관계 그것이 건강한 관계입니다.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아도 내가 가면 즐거워하시는 부모님, 그것은 부모님과의 관계가 좋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가져가도 반가워하지 않는 것은 내가 가져간 것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나와 부모님의 관계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무엇으로 드리는가가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문제입니다. 내가 예배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란 사람과의 관계가 어떠냐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한 것입니다.
제물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벨 그 자신과 가인 그 자신이었습니다.
예배 하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어떤 형식으로 예배하느냐보다 예배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같은 장소에 같은 시간에 똑같이 앉아 예배를 드렸는데 누구의 예배는 받고 누구의 예배는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압니다. 나 스스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 알았고 아벨이 알았습니다.
예배보다 먼저 할 일
주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가인은 그 마음 상태가 문제였습니다. 그는 예배를 마친 후 마음에 분이 가득했습니다.
5,6절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그 뿐 아니라 이미 마음에는 악을 행할 자세가 준비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선을 행할 수 없는 가인의 마음, 악으로 이어질 그의 분노를 하나님께서 읽으셨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척 하고 아무리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린다 한들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읽지 못하실까요?
결국 가인은 악을 행합니다. 예배 실패자의 당연한 결과입니다.
8절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했기에 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가인은 예배를 거부당했을 때 그의 마음을 바꾸고 그의 삶을 돌이켜야 했습니다.
교회 생활 하면서 마음이 불편하고 찬양하면서 누군가를 향해 원망이 가득하고 찬양할 만한 마음의 영적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그 찬양과 예배는 헛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가 경고합니다. 한 입으로 찬송도 하고 저주도 하는 이중성은 마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약 3:9-10).
안타까운 악순환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마음 상태 그래서 예배를 실패하고 예배를 실패하니 삶에 더욱 심각한 악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우린 어떤 예배자입니까?
예배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드리냐 보다 누가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광야에서 드리는 예배, 초라한 골방에서 드리는 예배, 북한의 지하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도 그 드리는 사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가 성공할 수 있도록 나를 건강하게 가꿔야 합니다. 나의 영적 상태를 건강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교회 생활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배입니다. 예배만 잘 드려도 충분합니다.
예배 잘 드리고 삶의 현장에서 건강하게 살아가고 많은 사람들에게 예배드린 자답게 선한 일을 하며 산다면 그것이 이상적입니다.
일군이 되기보다 예배자가 되십시오.
예배는 드리지 못한 채 교회 와서 회의하고 일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일군이 아닌 예배자를 찾습니다(요 4:23-24).
교회에서 교제만 하지 맙시다.
예배에 집중하면 사람에게 친절하고 예의바른 삶을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예배자로 사셨습니다. 예배를 살피시고 예배를 실패한 자들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최고의 예배를 십자가에서 드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생명까지 드리는 것이 예배였습니다. 우리도 그 예배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